[詩 에세이] 사과를 먹으며 > 지숲 Essay

時 에세이 사과를 먹으며 함민복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마비를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나무에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를 지탱해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보려다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사과를 먹는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 지혜의숲 時 코멘트 ‘하나라도 천 개인 사과’를 시(詩)로 읽습니다. 드디어 사과가 나를 먹습니다. 하나의 관계는 하나의 세계를 출현시킵니다. 무엇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세계가 나타납니다. 의미가 달라집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천 개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른 존재와 관계하면서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의미를 출현시킵니다. 우리는 순간마다 행위를 통해서, 말을 통해서 의미를 불러옵니다. 사과가 담고 있는 여러 가지 모습 중 하나를 호명하는 것입니다. 사과는 겸손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천 개의 모습 중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과는 과감히 자신을 내줍니다. 드디어 사과는 내 몸속으로 들어와 나로 변화합니다. 사과의 변신입니다. 우리의 만남이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순간순간 출현시키고 있는 장면이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출현시키고 있는 아름다운 세계에 잠시 머물러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즐기고 있는 세계가 다른 사람에게도, 다른 존재에게도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삶은 관계학(關係學), 연대(連帶)학입니다. 자신의 뇌 속에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기억들의 관계 속에서 생각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모든 발생(發生)은 관계가 숨어있습니다. 관계 속에 내가 있고, 관계 속에 삶이 출렁입니다. 아름다운 관계, 풍요로운 관계, 성취하는 관계, 변화하는 관계입니다. 차원이 낮은 사람들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즉자적(卽自的)입니다. 동물적이거나 무생물적인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즉자적인 관계는 무미건조하며 때로는 충돌하여 부조화, 불쾌한 상황을 출현시킵니다.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은 ‘배려(配慮)’하는 관계입니다. 배려하는 관계는 함께 만들어내는 상황, 함께 출현시키려고 하는 세계에 대해 아름다움을 디자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오직 인간의 몫입니다. 사유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인간다움의 증거입니다. 사유하는 마음과 배려하는 마음, 아름다움의 열망은 인간의 달란트이기때문입니다. 교육은, 아이들과 만남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가장 적극적이며 최고의 행위입니다. 나무를 교육하는 것, 땅을 교육하는 것, 기계를 교육하는 것, 강아지를 교육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인간을,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정말 성스러운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최고의 세계를 출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선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과를 먹으며’ 천 개의 세계를 사유합니다. 개처럼 사과를 먹는 것, 바퀴벌레처럼 사과를 먹는 것과 사람으로서 사과를 먹는 것이 분명 다름을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공이 낮은 존재도 내공이 높은 존재를 만나면 새로운 겹으로 변화합니다. 부디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진동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