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 에세이] 담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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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지혜의숲
- 작성일
- 23-05-2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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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에세이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時 코멘트
하이데거는 ‘벽은 네 부분으로 구성된 어떤 실체이다. 다시 말해서 땅, 하늘, 인간 그리고 신이 결합된 것’이라 했다. 벽! 벽에 대한 고전적이며 고정된 이미지는 폭력이며 가로막힘이다. 절망의 벽, 이곳과 저곳의 공간을 절단시키는 벽, 우리에게 벽은 수직으로 높이 서 있는 절벽이다. 수평의 경계는 더 이상 벽이 아니다. 아! 수평을 정복한 수직의 공포여!
사유의 벽이 있다. 사유에도 국경의 벽, 철조망이 있다. 사유를 멈춰야만 하는 경계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벽, 사유의 감옥이다. 제도의 벽, 시대의 벽, 시멘트와 콘크리트 벽, 되돌아오는 모든 것들의 끝에는 항상 벽이 있다.
관계의 벽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거리와 떨어짐, 빈공간이 있다. 이 공간이 벽이 되는 것이다. 이 공간이, 거리가, 비어있음이 자유가 아니라 도리어 벽이 되는 것이다. ‘바람은 하늘을 얻어 자유를 누린다’는데 우리들에겐 하늘이 벽이 되는 것이다.
최초의 벽은 어머니 배 속에 있다. 자궁에 둘러싸여 성장한다. 모든 세포는 막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의 피부는 몸을 둘러싼 ‘피부벽’이다. 모든 경계들. 그러므로 벽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답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그것이게끔하는 것들의 모임. 보이는 벽과 보이지 않는 벽.
인간의 눈앞에 서 있는 수직의 벽은 하늘을 나는 새들에겐 단지 하나의 선일 뿐이다. 둘러싸임. ‘여기 벽이 있다. 그 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벽은 유혹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유혹. 여행자는 늘 벽을 넘는다. 건너가는 것이다. 벽은 여행자의 몫이다. ‘내 권태의 벽 위에 너의 이름을 쓴다. 자유여’(폴 엘뤼아르)
벽에는 문제가 걸려있다. 즉 ‘벽은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모든 벽들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감각의 벽, 감각의 경계, 감각의 한계, 멈춤과 정지들, 그리고 넘어섬, 새로운 출현, 소통, 관계 맺음……. 이 개념들이 모두 벽과 함께 살고 있다.
혼자 넘어설 수 있는 벽이 있다. 홀로 느끼고 만끽하는 일탈의 즐거움, 홀로 건너야만 하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함께 넘어야 할 벽이 있다. 결코, 혼자서는 넘을 수 없는 벽. 세포들처럼, 막이 있되 서로 연결되어 통하는, 경계가 있되 끊임없이 분열하며 끊어지지 않고 넓혀가는 수천수만의 담쟁이들이 있다. 그 담쟁이들이 모여 하나의 존재를 이룬다.
모든 한숨은 벽 앞에서 나온다. 인간은 두 발로 서는 순간 수직의 벽을 만난다. 모든 대립자는 벽으로 다가온다. 모든 타자는 벽으로 찾아온다. 웃음을 거두어가는 벽, 굴복을 강요하는 벽들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전파들은 벽을 가볍게 통과한다. 원자, 전자들은 깔깔깔 웃으며 가볍게 모든 벽들을 넘나든다.
만약 벽이 주름이라면, 하나의 겹이라면. 모든 여행자는 벽을 만난다면. 홀로 넘을 수 있는 벽과 함께 넘어야 할 벽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먼저 저 벽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기를. 그리고 벽을 넘었을 때 펼쳐지는 광경이 상상했던 세계와 다르다 하더라도 그 어디에 항의할 생각은 아예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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