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숲스토리 시즌2 Vol.19 사유의 시작, 관찰: 관찰은 낯선 것과의 만남이다.
목록으로페이지 정보
- 작성자
- 지혜의숲
- 작성일
- 23-06-01 17:55
본문
모든 만남은 소나기처럼 다가온다. 네가 그랬다. “선생님, 우리 오빠 알아요?” 지혜의숲 데스크에 앉아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양 갈래머리를 묶고 온 얼굴이 미소로 일렁이던 네가 데스크 안쪽으로 불쑥 한 발을 내밀며 내민 첫 마디였다. “네 오빠 이름이 뭔 대?” “오승민이요. 저는요 나중에 크면 오빠하구 결혼할 거예요.” 내 마음에 번지던 벙긋함. 웃으면 당황할까 봐 짐짓 엄숙한 표정을 꾸몄으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던 작은 실소를 너는 들었을까. 너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런 네가 벌써 열한 살, 이름이 오빠와 똑같아 왠지 다정해진다던 ‘승민’이란 아이에게 고백을 들었다고 했다. “으아아!” 생각쑥쑥반 아이들은 네 이야기를 듣고 아연실색, 책상을 두드리며 관심과 반감이 반반씩 섞인 괴성을 질렀더랬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 애 참 불쌍하다.” 남자아이들의 반응에 정색을 하고 편들던 여자아이들, “왜에! 우리 승연이가 어디가 어때서, 우리 중 제일 착한데!” “안 들려 안 들려” 말발로는 여자애들을 이길 수 없음을 일찌감치 체득한 남자아이들이 쓰는 필살기 귀 막기. 진심은 계속 대화를 이어가고 싶기에 손바닥을 둥그렇게 부풀려 귀를 슬쩍 덮는 게 관건이다. “지난주에 주한이가 배고프다니까 자기 젤리 더 먹으라고 양보한 게 승연이잖아. 잊었어?” “응, 몰라.”
덕택에 쉬는 시간은 훌쩍 흐르고 너의 고백은 거기서 끊겼다. 궁금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음 주 수업이 황순원의 소나기, 일주일만 기다리면 내막을 알 수 있을 터 마음이 풍선처럼 한껏 부푼다. “이제 수업 시작할까?” “오예~ 렛츠 고!”
첫 주, 사고력 관찰 수업 ; 비교와 대조
만 10대가 지났으니 청소년이라 주장하는, 천진난만 열한 살들과 ‘관찰의 세계1102’ 내지에 적힌 유홍준(유한준의 ‘석농화원’에 기원을 둔 문장이다)의 글월을 읽는다. 입을 모아 엇박자로 읽는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상해. 알아야 사랑하게 되는 거 아니야?” 주의 깊은 주아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맞아.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잖아. 근데 사랑하면 뭘 알게 된다는 거지?”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한율의 맞장구. “얘들아, 들어봐. 자습 시간에 반장인 내가 떠든 친구 이름을 적어야 했어. 너희도 나한테 고백했다던 내 남친 알지?(대체 언제부터 남친인가! 사랑을 나눠 가져야 하는 자의 슬픔!) 승민이가 까불잖아. 엄청 고민하다 걔 이름을 적었는데 그 애가 나중에 그러더라고. 이름을 적어서 화가 났는데 오승연, 너는 공평한 애니까 괜찮아. 그니까 내 말은, 사랑하면 단점도 장점으로 보인다는 거야.” 두 손 두 발을 흔들며 승연의 말을 듣던 다연의 한마디. “내 방 물건들은 다 엄마만 사랑하나 봐. 내가 찾으면 없는데 엄마가 ‘다연이 너 들어가서 있으면 혼난다!’하고 문만 열면 물건들이 알아서 나타나거든.” “야 그건 엄마를 무서워하는 거야!”
‘핸드폰에 관심이 생기니 폰만 보이더라’는 뒤이은 정원의 말에 귀 기울이며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떠올렸다. 와일드는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에는 런던에는 안개가 없었다고, 반 고흐가 사이프러스를 그리기 전에는 프로방스의 사이프러스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썼다. 휘슬러와 반 고흐의 눈에 포착된 런던과 프로방스 풍경을 보고서야 사람들은 그곳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생략 가득한 문장을 헤쳐 사유를 풀어놓는 너희들은 휘슬러와 고흐의 후예들. 다만 사랑의 다른 이름인 호기심 빵빵 열한 살 지숲 아이들이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문학이고 그림이며 기억 속에 숨겨둔 그들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이 다를 뿐. 같은 텍스트 속의 인물을 보되 아이들이 발견하고 표현하는 의미와 언어도 모두 다르다. 정원의 눈과 주아의 눈, 승연과 한율의 눈은 올곧게 저만의 것이라 - 아이들이 몬드리안을 만나면 다섯 명의 몬드리안이, 두 팀이 잭슨 폴록을 만나면 열네 명의 잭슨 폴록이 탄생한다. 아이들과 더불어 비교와 대조 사고력 수업을 하는 첫 번째 시간, 교재 첫 장엔 굵은 고딕체로 이렇게 적혀 있다. 비교는 차이의 발견이다.
관찰은 철학에서 인식론이다. 관찰의 기쁨은 세상에 대한 발견의 놀라움으로부터 시작된다. 관찰은 내가 이 세계와 관계 맺기, 소통하기, 만나기의 출발이다. 여기서 세계는 ‘나’를 포함한다. 관찰은 감각으로부터 출발한다. 또한 관찰은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를 느끼는 것이고 나의 몸을 발견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에 대한 느낌, 발견이 바로 관찰이다.
사고력에서 관찰은 내가 세계를 만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는 것, 내가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 세계를 만나는 순간, 하나의 또 다른 세계가 연출되고 출현한다는 것이다. 관찰은 나와 세계와 관계를 찾아가는 여행의 출발이다.
이것이 나의 존재의 비밀이다. 관찰의 힘, 관찰의 비밀이다.
댓글 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