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숲스토리 시즌 2 Vol.23 인류의 시작 두발걷기 역사 텍스트를 사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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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지혜의숲
- 작성일
- 23-08-19 13:33
본문
인류의 시작 두발걷기, 역사 텍스트를 사유하다.
“이제부터 발표 글을 수업 전에 미리 메일로 받겠어요.”
지혜의숲은 4학년 후반, 5학년 초반 무렵에 역사 사고력 수업이 시작된다. 고학년 대접을 받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그 대접이라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위력을 발휘한다. 삐뚤빼뚤 손 글씨의 유치함을 벗어나 선생님과 고급한(?) 소통을 하게 된다는 묘한 자부심이 얼굴에 넘쳐흐르며 앉은 자세조차 의젓해진다. 빠르게는 일곱 살 ‘빛나는 사과’ 단계부터 한 팀으로 이끌어 온 아이들이니 이쯤에서 이런 방식으로 분위기 전환을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수업이 예고된 순간부터 아이들은 한숨을 쉬기 시작한다. “지숲이 사회학원이에요? 난 외우는 것 딱 싫어하는데?” 이상하다. 앞 프로그램에서도 분명 책 읽기는 있었는데 왜 아이들은 역사책 읽기를 ‘공부’로 여기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왜 지숲은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럼 지금까지 우리가 한 일은 공부가 아니고 놀이였단 말인가?
학부모들도 반응이 다양하다. 드디어 지숲 수업으로 교과 성적을 올릴 수 있겠다고 매우 기대하는 학부모들이 있는 반면, “한국사는 이미 뗐는데요?”라고 못마땅해하는 학부모들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걱정이 한가득하다. 나는 역사 전공자가 아니고 달달 외워야 했던 역사 수업을 아주 싫어했던 어린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주어 강조하는 말, “지숲은 사고력 수업을 할 뿐이에요!” 그렇다. 나는 지숲 선생님이지 역사 선생님은 아니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도 없다’라는 말도 외치지 않겠다.
교육에서 역사를 다루는 다양한 의미가 있겠지만, 지숲은 지혜의숲다운 방식으로 역사를 만난다. 지숲에서 역사는 거대한 텍스트이다. <피노키오>나 <베니스의 상인>과 같은 문학처럼, 피카소, 모네, 마그리트의 명화처럼, <천국의 아이들>이나 <꼬마돼지 베이브>와 같은 영화처럼 아이들이 생각의 불꽃을 마구 피워낼 사고력 활동의 지식 텍스트이다. 유아나 저학년 시기의 아이들은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계에서 살아간다. 삐아제는 인지발달 단계에서 이 시기를 인지발달 3단계인 구체적 조작기에서 형식적 조작기로 이행하는 시기라고 한다. 그러다 열 살이 넘어가며 객관적 세계에 살고 있는 ‘나’를 이해하게 되고 현실 세계와 나의 관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난다. 한 추상적인 개념과 보편적 법칙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 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제 동화적인 세상에서 벗어나 내가 살고 있는 삶과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고학년 시기의 아이들이 사고력을 키울 수 있는 굉장히 매력적인 텍스트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과거인들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들이다. 사건의 기록보다 더 많은 것이 시간이 남겨둔 모호한 기호들이다. 흔적들이다. 화석으로 남은 뼈 하나가, 날카로운 돌 하나가, 깨어진 그릇 하나가, 무덤 속 색바랜 그림 하나가, 무너져내린 집터의 주춧돌 하나가 힌트가 되고 단서가 되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그것들을 요리조리 들여다보며 질문하고 추론하고 상상하는 일이다. 해석하는 일이다. 이보다 더 좋은 생각거리가 있을까?
또 역사는 ‘나’를 밝히고 해명하게 해준다. 우리는 역사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서 있으며 그 페이지를 완성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내가 태어난 이유, 내가 살아온 이유, 내가 살아갈 이유가 모두 역사 속에 있다. 우리는 역사적 존재인 것이다. 나의 삶에 이토록 방대하고 위대한 이유를 가져다 붙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또 무엇이 있으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설렘과 두려움, 기대와 부담을 동시에 안겨주는 역사 사고력 수업이 시작되었다. 역시나 이번 팀에도 역사를 너무 사랑하는 녀석이 있어서 일단 든든하다. 부디 전문지식을 마음껏 자랑해주어 이 선생의 부족함을 메꾸어 주길 바란다. 예전에 그리스 로마신화 수업을 할 때도 나는 잘 외우지도 못하는 수많은 그리스인들의 이름을 줄줄이 기억해주고 단추만 누르면 자동 응답하듯 그물처럼 촘촘히 연결된 수많은 스토리들을 소개해 주는 아이가 있어서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연도를 줄줄이 외워주는 아이, 영웅들의 스토리를 디테일하게 전해주는 아이, 교사의 잘못된 지식을 정정해줄 아이가 있겠지? 내가 할 일은 자랑하고 질문하고 추론하고 상상할 무대만 연출해주면 될 뿐이다.
역사란 무엇일까? 무엇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일까? 열심히 질문해본다. 그리고 아이들이 내놓은 대답은 바로 ‘인간’이다. 그래? 무엇이 인간인데? 갑자기 흔들리는 아이들의 눈빛을 느끼며 놀이는 시작된다. 다음 중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두 골라보자.
냄새 맡기, 두발로 걷기, 차 마시기, 사랑, 집짓기, 신발 신기, 여행하기, 장례식, 비명 지르기, 충치, 방귀, 입냄새, 악수하기, 소식 전하기, ‘난 너를 좋아해’라고 말하기, 사칙연산, 전쟁, 수영하기, 달리기, 높이뛰기, 던지기, 잠꼬대, 미소 짓기, 요리하기, 약속하기, 시계 보기, 흰머리, 질투하기, 성씨를 갖기, 휘파람, 음악 듣기, 수다 떨기, 사색하기, 함께 모여 살기, 기지개펴기, 글쓰기, 땀 흘리기, 미워하기, 옷을 만들어 입기, 하품하기, 놀이하기, 규칙 만들기, 병을 앓기, 치료하기, 우산 쓰기, 계획하기, 나눠 먹기, 표정 짓기, 고민하기, 상사병, 이성적 사고, 반성하기…
네모 박스에 이런 말들을 늘어놓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게 했더니 급기야는 논쟁을 넘어 싸움이 일어날 판이다. 명료한 것도 있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며 저마다 견해가 다른 것들도 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여행은 인간만이 하는 것일까? 철새들이나 물고기들이 이동하는 것은 여행이 아닐까? 자기 집 강아지가 잠꼬대를 하고 다양한 표정을 짓는 걸 똑똑이 봤다고 우기는 아이도 있다. 그래? 동물들도 고뇌하고 질투할까? 그 와중에 “상사병이 뭐에요? 선생님?”이라고 질문하는 아이, 그래 인간이지만 상사병에 걸려보지 못한 인간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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